책리뷰

[책 리뷰] 인터내셔널 부커상 수상작 <그날 저녁의 불편함>

dxd_tourist 2023. 1. 3. 00:12
반응형

매우 불편한 책을 읽었습니다. 제목처럼 그날 저녁의 불편함만이 아니라 읽는 내내 불편했는데요. 2020년 인터내셔널 부커상을 수상한 네덜란드의 작가 마리커 뤼카스 레이네펠트의 작품 <그날 저녁의 불편함>을 소개할게요. 


그날 저녁의 불편함

나는 열 살입니다.
그날 이후 나는 코트를 벗지 못해요.

이야기의 배경은 네덜란드의 작은 젖소농장입니다. 10살 야스는 부모님과 두 명의 오빠, 그리고 여동생과 함께 비슷한 일상을 살아갑니다. 딱히 행복할 것도, 불행할 것도 없는 매일매일이 흘러갑니다. 두꺼비를 관찰하고 젖소들을 돌보면서요. 그러던 어느 겨울날, 스케이트를 타러 호수에 간 큰오빠 맛히스가 돌아오지 못합니다. 갑작스러운 맛히스의 죽음. 그로 인해 야스를 비롯한 가족들이 큰 슬픔과 충격에 빠지는데요.

 

그리고 1년 반이 지나지만 달라진 것은 없습니다. 여전히 맛히스의 죽음에 침묵하며 각자의 방식으로 살기 위해 발버둥칩니다. 야스 역시 나름의 방식으로 슬픔과 충격을 견디는데요. 그날 이후 코트를 벗지 않는다든지, 배에 압정을 박아둔다든지, 똥을 누지 않는다든지 등등.  다소 기이하지만, 열 살 아이다운 발상과 방식으로 자신을 슬픔으로부터 지켜갑니다.  그 와중에 나날이 말라가는 엄마를 보며 엄마도 죽지 않을까? 그런 엄마를 따라 아빠도 죽지 않을까? 불안한 매일을 견디며 살아갑니다.

 

그런데 불행은 이게 끝이 아니었는데요. 야스네 농장에 구제역이 덮치 젖소 전부를 살처분하게 되면서 가족의 비극은 극에 달합니다.  그럼에도 슬픔을 꺼내놓고 말하지 않는 관습, 그 불편함이 결국 더 큰 불행을 만드는데요. 충격적인 결말에 한동안 멍했던 작품이었습니다. 

인터내셔널 부커상 최연소 수상자
마리커 뤼카스 레이네펠트

네덜란드의 작가 마리커 뤼카스 레이네펠트는 소설 속 주인공 야스처럼 농사를 짓고 목축을 하는 가정에서 나고 자랐습니다. 초등학교 시절 해리포터를 너무 좋아해서 전체를 필사해 컴퓨터에 저장해 놓고 몇 번이고 읽으며 창작의 꿈을 키웠다는데요. 학교에서 지나치게 보이시하다는 이유로 왕따들 당했던 작가는 19살에 스스로 중간이름 뤼카스를 지으며 넌바이너리를 선언했다고 합니다.  2015년 첫 시집 <송아지의 털>을 발표했고, 2018년 첫 장편소설 <그날의 불편함>을 발표했는데요. 두 작품 다 신인상을 받으며 시와 소설 두 분야에서 가장 촉망받는 신예 작가가 떠오릅니다. 특히 세 살 때 오빠를 읽었던 경험을 바탕으로 무려 6년 동안 집필해 완성한 <그날 저녁의 불편함>은 2020년 인터내셔널 부커상을 받는데요. 당시 작가의 나이가 28세로 역대 최연소 수상자였다고 합니다.

굴을 쓴다고 치유되는 건 아니지만
글을 쓸 때만 외롭지 않을 수 있었다.

 

아마도 보수적인 개혁교회 신자인 부모 밑에서 고립된 시골 생활을 해야 했던 작가에게 글쓰기는 자신을 지키는 방법이 아니었을까요?

 

 

충분한 애도가 필요해

우리 사회는 불행을 터놓고 얘기하는 것을 터부시 합니다. 특히 남자들은 눈물조차 참도록 강요되어 왔는데요. 그래도 세상이 달라져 예전보다야 많이 나아졌지만, 슬픔을 얘기하긴 여전히 서툽니다. 슬픔을 빨리 이겨내거나, 감추려고만 합니다. 하지만 감정은 감출수록 더 크게 드러나는 법이니까요. 게다가 부정적인 감정은 어느 순간 폭력적으로 폭발하곤 합니다.

 

만약 야스네 가족이 맛히스의 죽음을 함께 슬퍼하고 충분히 애도했더라면 어땠을까요? 롤랑 바르트처럼 애도일기까진 쓰지 않더라도 말이죠. 왜 그런 말도 있잖아요. '기쁨은 나눌수록 배가 되고 슬픔은 나눌수록 반이 된다.' 그 말을 야스네 가족은 몰랐던 걸까요? 네덜란드엔 그런 말이 없는 걸까요? 매우 안타까웠습니다. 

 

야스는 끊임없이 누군가가 자신의 슬픔을 알아봐 주길 바랐는데요. 끝끝내 이루지 못했습니다. 그러고 보니 책의 꽤 앞부분에서 이미 결말이 스포 되어 있었더라고요. 

 

“내가 보기에 신앙을 잃는 데에는 두 가지 방법이 있는 것 같다.
자기 자신을 찾음으로써 하나님을 잃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
자기 자신을 잃음으로써 하나님까지 잃는 사람들도 있다.
나는 후자에 속하는 것 같다.
p84


부모의 역할에 대한 생각 

이 책을 읽으면서 부모의 역할에 대해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세 아이들을 슬픔에 방치한 야스의 부모는 나쁜 사람일까요? 야스의 입장에선 아빠의 행동이 폭력에 가까웠지만, 결국 야스를 위한 나름의 방식이었습니다. 슬픔을 주체하지 못해 자신을 돌보지 않는 엄마는 아이들에게 폭력에 가까운 불안을 안겼지만, 나름 치열하게 버티는 방식이었을 테니까요.  그들 역시 불행에 침묵하는 오랜 관습의 피해자일 뿐. 그들에게 죄가 있다면 무지함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감정을 다루는 법, 표현하는 법을 모르는 무지함. 그래서 소통하지 못한 점. 

 

야스는 오빠를 잃었지만, 부모의 입장에선 자식을 잃었잖아요. 그 슬픔의 무게를 비교할 순 없지만, 자식을 잃은 부모의 마음을 어찌 말로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오죽하면 자식을 가슴에 묻는다잖아요. 그래도 부모는 남은 자식을 챙기고 보듬어야 할 의무와 책임이 있습니다. 그러니 더 강해야만 한다고 말하고 싶진 않습니다. 부모 역시 나약한 사람이니까요. 

 

다만, 부모도 자식과 함께 성정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필요하면 자식에게 배울 수도 있고 기댈 수도 있어야 한다고 말이죠. 아무튼 여러모로 부모 역할은 참 어렵습니다.  


<그날 저녁의 불편함>은 너무나도 잔혹하고도 슬픈 이야기였습니다. 충격적인 결말이지만, 그래서 한편으로는 마음이 편하기도 했는데요. 더 이상 야스의 배에 박혀있는 압정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고, 비로소 야스가 슬픔으로부터 벗어났으니까요.  결국 슬픔은 남겨진 자들의 몫입니다. 

 

 
그날 저녁의 불편함(양장본 Hardcover)
2020년 8월 26일, 바이러스 확산 방지를 위해 비대면으로 치러진 부커 인터내셔널 시상식. 다니엘 켈먼, 오가와 요코, 사만타 슈웨블린 등 쟁쟁한 작가를 제치고 낯선 얼굴이 화면에 잡혔다. 바로 스물아홉 살 네덜란드 작가 마리커 뤼카스 레이네펠트다. 2016년 이 상을 수상한 한국의 한강 작가, 2017년 수상자인 이스라엘 문학의 거장 데이비드 그로스먼, 노벨문학상까지 휩쓴 2018년 수상자 올가 토카르추크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 인터내셔널 부커상은 주로 자국에서 탄탄한 기반을 가진 작가에게 수여되었다. 그러나 《그날 저녁의 불편함》은 작가의 첫 소설이었고, 수상 이력도 많지 않았다. 역대 최연소 수상자를 낸 네덜란드는 축제 분위기에 휩싸였고 언론은 ‘깜짝 수상’이라며 취재에 열을 올렸다. 《그날 저녁의 불편함》은 마리커 뤼카스 레이네펠트가 스물일곱 살에 발표한 첫 소설이다. 이 작품으로 세계 3대 문학상으로 꼽히는 인터내셔널 부커상을 수상했지만, 그의 가족은 아직 이 사실을 기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레이네펠트는 “(내가 부커상 후보에 오르고) 온 동네 사람들이 내 책을 이야기하는 동안에도 나의 가족은 너무나 두려워 내 책을 읽지 못했다”며, “작가가 태어나는 것은 사실 집안의 불행이다”라고 밝히기도 했다. 소설 속 야스의 가족처럼 작가의 가족도 농사를 짓고 목축을 했으며 성경 말씀을 철저히 지켰다. 그리고 작가 역시 세 살 때 오빠를 잃었다. 그 상실의 경험을 바탕으로 무려 6년에 걸쳐 집필한 소설이 바로 《그날 저녁의 불편함》이다. 가족이 받아들이지 못한 것은 그의 소설만은 아니었다. 레이네펠트는 젠더퀴어로서 자신을 남성과 여성의 이분법에서 벗어난 ‘넌바이너리’로 선언했다. 중간이름 ‘뤼카스’ 역시 스스로 붙인 것이다. 이 또한 가족에게 수용되기까지 긴 시간이 필요했다. 글을 쓰면서 시작된 변화는 작가를 성장시키고 단련시켰다. “쓴다는 것은 자기 자신을 갖고 노는 일이다. 랩톱 컴퓨터 앞에 있을 때 나는 비로소 강해진다.” 세계가 주목하는 새로운 목소리는 이렇게 탄생했다.
저자
마리커 뤼카스 레이네펠트
출판
비채
출판일
2021.11.22
반응형